마을의 역사칠석옻돌마을

고싸움놀이는 광주광역시에서 남서쪽으로 12Km 떨어진 남구 칠석동 옻돌마을에 정월대보름 세시풍속으로 전해 내려온 전통 민속놀이다. 이 마을은 마을 앞산에 고인돌 9기가 있고 인근의 송암동 선사유적지와 지석강 선사유적으로 미루어, 청동기 시대부터 주민이 살아온 3,000년 역사의 오랜 마을이다.
삼한시대와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영조시대인 175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광주목 41면 중 칠석면(漆石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칠석동의 마을 이름은 검은 옻색의 고인돌이 있어 우리 말로 옻돌마을이라 일컫는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칠석마을은 대한제국 시기에는 광주군 칠석면에 속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호로 강제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 졌다.
이에 따라 현재의 대촌동에 통합되었고, 해방 이후 1957년 광산군 대촌면이 광주시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광산군 대촌면으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1일 법률 제8,963호에 의하여 광주직할시의 구역 확장으로 광산구 칠석동이 된 후, 1995년 광산구에서 남구 대촌동으로 편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칠석마을의 자연환경은 마을 동쪽에 마을의 주산인 큰재산(죽령산,해발250m)이 있고, 서쪽에 영산강의 지류인 대촌천이 흐르고 있어, 마을 입구에서 대촌천까지 넓은 들판이 펼쳐져 경작할 토지가 많아 비교적 큰 규모의 촌락이 들어설 풍요로운 자연조건을 지니고 있다.
넓은 농경지에서 쌀, 보리 등 농산물을 풍요롭게 생산하여 300여 가구에 1,000여명의 주민들이 자손대대로 살아가는 큰 촌락을 형성 발전하였다.
마을사람들은 500여 년 전 까지는 죽령산 밑 상촌 당산나무 인근에 마을을 이루고 거주하여 오다가, 조선 중기이후 칠석제의 조성 등으로 논농사가 확대 되면서 죽령산의 개울 물길을 따라 차츰 현재의 위치로 마을이 확대되어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옻돌마을은 고려시대 조성된 남평현의 광리역에서 5리 정도 떨어져 광주목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나주목의 영산창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길이다. 광주목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물산은 영산강의 지류인 지석강의 남평현 나루에서, 광리, 칠석, 도촌, 원산, 양과동을 거쳐 지났는데, 옻돌마을은 이러한 교통로의 중심지로, 현재도 국도 1호선을 보완하는 지방도로 819호 선이 옛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옻돌마을은 풍수설에 와우상(臥牛相), 즉 황소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상이라 터가 무척 거세어, 황소가 뛰어다니게 되면 전답의 농사를 망치게 되므로 일어서지 못하게 황소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구유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놓았다.

그리고 고삐는 할머니 당산인 은행나무에 묶어 놓았으며, 꼬리부분에 해당되는 곳을 돌로 눌러 놓았다 하며, 이처럼 거센 터를 눌러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고싸움놀이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옻돌마을은 풍요로운 자연조건과 활발한 물산의 유통 입지에 따라 전통문화와 다양한 관습, 오랜 역사유적이 다양하게 보존 발전해 왔다. 마을에는 고인돌 9기 외에도, 마을 당산목(堂山木)인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있다.
마을의 한 할머니가 꿈에 산신령으로부터 은행 씨를 받아 마을 어귀에 심고 가꾸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은행나무(광주광역시 기념물 10호)는 수령이 800년 이상인 것으로 추정(문화재청 기록)되고, 소나무는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 된다.
현재까지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2월 초하루에 대공사(大公社)라고 불리는 마을 주민 총회를 이어오고 있는 데, 이는 마을에 삼한시대부터 오래도록 전해온 상부상조의 동계, 향도계(香徒契), 상부계 등이 조선시대 칠석동 향약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마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여겨진다.

마을에는 부용정(芙蓉亭), 무송정(撫松亭)의 유적이 있는 데, 부용정(芙蓉亭)은 고려 말 광주 평장동 태생의 김문발(金文發)이 만년에 세운 별서이며, 무송정은 한말의 삼봉(三奉) 서태환(徐台丸)이 세운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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